레이블이 찜한영화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찜한영화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7년 10월 8일 일요일

도시관련 영화




<상계동 올림픽> (1988)
88년 한국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각 언론들은 역사적인 일인양 떠들어댔고 그 영향으로 국민들도 들떠있었다. 그러나 그 외곽에는 그로 인한 소외된 우리 이웃이 있었다.올림픽에 오는 외국손님들에게 가난한 서울의 모습을 보이면 안된다는 도시미학적(?) 관점에서 진행된 달동네 재개발사업. 이 때문에 상계동 주민들을 비롯한 서울 200여곳의 달동네 세입자들은 아무 대책도 없이 몇십년씩 살던 집에서 쫓겨나야 했다.주민들은 최소한의 삶의 공간을 보장하라고 외쳤지만 정부는 철거깡패와 포크레인, 그리고 전투경찰을 앞세워 무자비하게 그들을 구속하고 집을 철거해 버렸다.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고 했지만, 언론마저 침묵해버렸던 독재의 시대.

<행당동 사람들> (1994)
재개발이 시작된 지난 93년 가을부터 강제철거의 과정에서 삶의 자리를 잃고 살아 가는 행당동(하왕2-1지구)사람들의 고통과 사랑, 공동체에 대한 꿈을 기록한 영화. 그리고 현재 빈민단체, 종교계, 학계를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재개발 입법안을 소개하고 있다.

<또 하나의 세상, 행당동 사람들 2> (1999)
부당한 철거에 맞섰던 행당동 주민들의 투쟁과 공동체에의 꿈을 담았던 <행당동 사람들>의 후속 작품. 행당동 철거민들은 3년여의 철거투쟁을 승리로 끝내고 95년 말 임시주거시설에 안착했다. 그들은 가난을 딛고 자신을 실현하기 위한 생산협동조합, 신용협동조합운동을 통해 지역공동체를 건설해나가고 있다.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는 행당동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대안적 삶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과 희망을 제시한다. 

<말죽거리 잔혹사> (2004)
1978년 말죽거리의 봄, 현수(권상우)는 강남의 정문고로 전학온다. 정문고는 선생 폭력 외에도 학생들간 세력다툼으로 악명높은 문제학교. 이소룡 열혈팬이라는 이유로 금새 죽고 못사는 친구가 된 모범생 현수와 학교짱 우식(이정진). 하교길 버스안에서 올리비아 핫세를 꼭 닮은 은주(한가인)을 보고 동시에 반하는 현수와 우식. 하지만 은주는 다정한 현수보다 남자다운 우식에게 빠져든다.

<강남 1970> (2014)

2017년 6월 19일 월요일

목소리의 형태 - 국내 메인 예고편




글쓴이 / 최기숙
출처: 실학산책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애니메이션 〈목소리의 형태〉(2016)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쇼코’가 한 초등학교에 전학 오면서 ‘쇼야’와 동급생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쇼코는 마르고 키 작은 장애 소녀다. 그녀는 세 겹의 불리한 옷을 입고 있다.). 아름다운 영상미와 감성 로맨스로 홍보되었지만, 왕따, 집단 괴롭힘, 장애, 트라우마 등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에,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들은 그런 심리적 부담을 기꺼이 감당하려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보다 관객의 반응이 더 인상적
   과연 영화보다 더 깊은 느낌을 준 것은 관객의 반응이었다. 침묵과 어둠 속에 스스로를 통제하기로 약속한 관객들은 영화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친구들과 농담을 나누고, 사소한 일상에 대해 속삭이며, 커다란 팝콘 통을 껴안은 것만으로도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되고 시간이 지나자, 어디선가 조심스럽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마치 전염성을 지닌 듯 객석의 여기저기로 파고들어, 울고 있는 사람의 위치를 소리로 알리는 어둠 속의 눈물 지도를 형성했다. 팝콘을 껴안은 두 팔은 머쓱해졌다.

   영화는 한때 초등학교 교실에서 발생했던 단속적인 사건이 그 누구에게도 결코 완전히 단절적이고 분절적인 경험으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전하고 있었다. 어른들이 ‘철없던 시절’이라고 말했던, 초등학교 교실에서 했던 행위들은 그것을 경험하고 관찰하고 목도하거나 스쳐 지난 모든 이들의 성장에 영향을 미쳤다. 시간이 지난 뒤에도 한때 그들을 지배했던, 또는 스스로 외면했던 무시와 모욕, 슬픔과 좌절, 억울함과 분노, 죄책감은 그동안 자란 키 높이만큼 발육을 늦추지 않았고, 쐐기풀처럼 엉켜 있거나 억새처럼 웃자라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 애초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서로를 스스럼없이 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이 원한 건 ‘살아가기’라는 삶의 문제이지, 위선적으로 ‘삶을 연기(acting)’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이것은 영화 속의 인물이 여전히 ‘청소년기’여서 가능한 모습일 것이다. 성인기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러나 마음과 기억의 생리는 다르지 않다.).

   신기한 것은 영상 속 인물들이 마음 깊은 곳에 저장해 둔 오래전의 ‘그 사건’을 다시 떠올렸을 때, 내 마음속에도 문득 ‘그때의 사건’이라 할 만한 것, 평소에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그것이 하나의 독립된 섬처럼 의식의 표면에 떠올랐다는 점이다. 영화가 건드린 것은 인물의 과거나 심리, 무의식이 아니라,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의 기억과 망각, 의식과 무의식의 심층이었다. 관객은 단지 영화 속의 인물에 공감해 우는 것이 아니라, 영화로 인해 환기된 자신의 망각된 과거, 가려진 마음, 덮어두었던 무의식의 넋을 장례 치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하나 둘 사람들이 일어설 때에, 좌석 뒤쪽에서 누군가 “열 번 봤는데…”라고 말했다. 목소리는 담담하고 진지했다. “난 세 번째야.”라는 다른 목소리도 들렸다(아마도 그 친구였을까). 한 영화를 기꺼이 세 번이고 열 번이고 보는 심리는 무엇일까(물론 이 영화의 정서가 시종일관 무거웠던 건 아니다. 만화가 갖추는 기본기로서의 유머와 재치는 물론 서정적인 영상미가 감정의 균형을 맞추어주기 때문.).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면서 떠오르는 자신의 과거, 상처, 망각된 어둠과 응대하기 위한 적극적인 모색이 아니었을까.

좋은글좋은자료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html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