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최기숙
출처: 실학산책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애니메이션 〈목소리의 형태〉(2016)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쇼코’가 한 초등학교에 전학 오면서 ‘쇼야’와 동급생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쇼코는 마르고 키 작은 장애 소녀다. 그녀는 세 겹의 불리한 옷을 입고 있다.). 아름다운 영상미와 감성 로맨스로 홍보되었지만, 왕따, 집단 괴롭힘, 장애, 트라우마 등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에,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들은 그런 심리적 부담을 기꺼이 감당하려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보다 관객의 반응이 더 인상적
과연 영화보다 더 깊은 느낌을 준 것은 관객의 반응이었다. 침묵과 어둠 속에 스스로를 통제하기로 약속한 관객들은 영화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친구들과 농담을 나누고, 사소한 일상에 대해 속삭이며, 커다란 팝콘 통을 껴안은 것만으로도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되고 시간이 지나자, 어디선가 조심스럽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마치 전염성을 지닌 듯 객석의 여기저기로 파고들어, 울고 있는 사람의 위치를 소리로 알리는 어둠 속의 눈물 지도를 형성했다. 팝콘을 껴안은 두 팔은 머쓱해졌다.
영화는 한때 초등학교 교실에서 발생했던 단속적인 사건이 그 누구에게도 결코 완전히 단절적이고 분절적인 경험으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전하고 있었다. 어른들이 ‘철없던 시절’이라고 말했던, 초등학교 교실에서 했던 행위들은 그것을 경험하고 관찰하고 목도하거나 스쳐 지난 모든 이들의 성장에 영향을 미쳤다. 시간이 지난 뒤에도 한때 그들을 지배했던, 또는 스스로 외면했던 무시와 모욕, 슬픔과 좌절, 억울함과 분노, 죄책감은 그동안 자란 키 높이만큼 발육을 늦추지 않았고, 쐐기풀처럼 엉켜 있거나 억새처럼 웃자라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 애초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서로를 스스럼없이 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이 원한 건 ‘살아가기’라는 삶의 문제이지, 위선적으로 ‘삶을 연기(acting)’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이것은 영화 속의 인물이 여전히 ‘청소년기’여서 가능한 모습일 것이다. 성인기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러나 마음과 기억의 생리는 다르지 않다.).
신기한 것은 영상 속 인물들이 마음 깊은 곳에 저장해 둔 오래전의 ‘그 사건’을 다시 떠올렸을 때, 내 마음속에도 문득 ‘그때의 사건’이라 할 만한 것, 평소에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그것이 하나의 독립된 섬처럼 의식의 표면에 떠올랐다는 점이다. 영화가 건드린 것은 인물의 과거나 심리, 무의식이 아니라,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의 기억과 망각, 의식과 무의식의 심층이었다. 관객은 단지 영화 속의 인물에 공감해 우는 것이 아니라, 영화로 인해 환기된 자신의 망각된 과거, 가려진 마음, 덮어두었던 무의식의 넋을 장례 치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하나 둘 사람들이 일어설 때에, 좌석 뒤쪽에서 누군가 “열 번 봤는데…”라고 말했다. 목소리는 담담하고 진지했다. “난 세 번째야.”라는 다른 목소리도 들렸다(아마도 그 친구였을까). 한 영화를 기꺼이 세 번이고 열 번이고 보는 심리는 무엇일까(물론 이 영화의 정서가 시종일관 무거웠던 건 아니다. 만화가 갖추는 기본기로서의 유머와 재치는 물론 서정적인 영상미가 감정의 균형을 맞추어주기 때문.).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면서 떠오르는 자신의 과거, 상처, 망각된 어둠과 응대하기 위한 적극적인 모색이 아니었을까.
영화는 한때 초등학교 교실에서 발생했던 단속적인 사건이 그 누구에게도 결코 완전히 단절적이고 분절적인 경험으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전하고 있었다. 어른들이 ‘철없던 시절’이라고 말했던, 초등학교 교실에서 했던 행위들은 그것을 경험하고 관찰하고 목도하거나 스쳐 지난 모든 이들의 성장에 영향을 미쳤다. 시간이 지난 뒤에도 한때 그들을 지배했던, 또는 스스로 외면했던 무시와 모욕, 슬픔과 좌절, 억울함과 분노, 죄책감은 그동안 자란 키 높이만큼 발육을 늦추지 않았고, 쐐기풀처럼 엉켜 있거나 억새처럼 웃자라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 애초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서로를 스스럼없이 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이 원한 건 ‘살아가기’라는 삶의 문제이지, 위선적으로 ‘삶을 연기(acting)’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이것은 영화 속의 인물이 여전히 ‘청소년기’여서 가능한 모습일 것이다. 성인기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러나 마음과 기억의 생리는 다르지 않다.).
신기한 것은 영상 속 인물들이 마음 깊은 곳에 저장해 둔 오래전의 ‘그 사건’을 다시 떠올렸을 때, 내 마음속에도 문득 ‘그때의 사건’이라 할 만한 것, 평소에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그것이 하나의 독립된 섬처럼 의식의 표면에 떠올랐다는 점이다. 영화가 건드린 것은 인물의 과거나 심리, 무의식이 아니라,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의 기억과 망각, 의식과 무의식의 심층이었다. 관객은 단지 영화 속의 인물에 공감해 우는 것이 아니라, 영화로 인해 환기된 자신의 망각된 과거, 가려진 마음, 덮어두었던 무의식의 넋을 장례 치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하나 둘 사람들이 일어설 때에, 좌석 뒤쪽에서 누군가 “열 번 봤는데…”라고 말했다. 목소리는 담담하고 진지했다. “난 세 번째야.”라는 다른 목소리도 들렸다(아마도 그 친구였을까). 한 영화를 기꺼이 세 번이고 열 번이고 보는 심리는 무엇일까(물론 이 영화의 정서가 시종일관 무거웠던 건 아니다. 만화가 갖추는 기본기로서의 유머와 재치는 물론 서정적인 영상미가 감정의 균형을 맞추어주기 때문.).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면서 떠오르는 자신의 과거, 상처, 망각된 어둠과 응대하기 위한 적극적인 모색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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